앙코르 건축과 역사적 개요

 

캄보디아의 어원은 캄퓨챠에서 유래되는것 같다. 우리가 곰을 숭상하는 단군신화가 있다면 이들에게는 뱀 신화가 있다. 인도의 한 귀족(인도 캄퓨챠의 왕족)이 선몽을 받고 이곳으로 와서 뱀신을 숭상하는 족속의 공주와 결혼해서 부남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캄보디아의 최초 국가로 알려 지고 있다. 그후 진랍이라는 나라를 거쳐서 9세기에 앙코르 왕조가 들어 서면서 본격적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앙코르 왕조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고 한다. 유럽의 건축물이 고딕, 로마네스크, 로코코등으로 분류된다면 앙코르의 유적지는 위 3가지 시기에 따라서 구분된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왕들은 생전에 3가지 업적을 남겨야 한다고 한다. 조상을 위한 사원을 건립해야 하고 자신을 위한 사원을 건립해야 하며 국민을 위한 관계수로를 개발하고 관리 해야 한다고 한다. 앙코르왕조 600년동안 이 3가지를 모두 잘 수행한 왕은 6명에 불과 했다고 한다.

 

1기는 9세기 초에서 11세기 초까지 인데 자야바르만 2세(앙코르왕조 건국)~자야바르만5세까지 2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자야바르만 2세는 프놈쿨렌에 도읍을 정하고 국명을 캄부자(나중에 캄푸치아로 변경) 로 정한다. 이시기의 유적군은 룰루오스 유적지에 있는 프레아코 바콩사원 이며 이시기 말의 유적지로는 반테이 스레이가 있다.

 

2기는 11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로 부터 12세기 후반 참족(베트남 참파왕조를 가르키는 듯 함)의 침략기까지 약 160년의 기간을 말 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적은 뭐니뭐니 해도 수리야바르만2세가 지었다는 앙코르와트 이다. 사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참파원정중 전사 했는데 그런 이유로 앙코르와트는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후일 완공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이나 파리의 인구가 몇만에 불과 했는데 위성 촬영결과 앙코르와트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 였다고 한다. 참고로 앙코르 모든 사원의 출입구는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앙코르와트만큼은 서쪽으로 만들어 있는데 그 이유를 수리야바르만2세의 무덤의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앙코르 관념에서 서쪽은 저승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조와는 반대로 수리야 바르만2세는 삼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제3기는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 아유타 왕국에 멸망한 1432까지의 약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르킨다. 자야바르만 7세의 경우는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 지방의 영주로 쫒겨나 있었는데 참족의 침입으로 왕이 살해 당하자 참족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 지는 인물이다. 50세에 왕위에 올라서 90여세까지 장수한 왕이다. 이시기에 앙코르 톰이 조성되었다. 앙코르는 현재 남은 기록이 없다. 앙코르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원 테무르칸의 사신으로 앙코르톰에 왔던 주달관이 남긴 <진랍풍토기> 이다. 1296년 앙코르톰에 들어와 약 1년간 인드라바르만3세의 곁에 머물면서 약 40쪽 분량의 저술을 했는에 이것이 당시 앙코르를 묘사한 유일한 서적이다.

 

앙코르의 중요한 왕들

 

1세기경 카운디냐라는 인도의 브라만에 의해 건설된 후난(부난)왕국이 최초의 왕조라고 일컬어짐. 진랍이라고 일컬어지는 왕국은 부난의 속국이었으나 7세기 무렵 부난을 멸하고 캄보디아 왕조의 정통을 계승함. 자야바르만1세 사후 왕위다툼으로 육진랍과 수진랍으로 분리

 

1. 자야바르만 2세 (한국은 신라 애장왕 시대) 힌두교 숭상

수진랍의 왕가 출신으로 아마도 포로로 잡혀간듯 하다. 그후 자바에서 귀국하여 캄보디아 통일왕조를 세움. 통레사프호 북서안에 위치한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한다.

 

*위키백과 참고*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로 돌아오기 전 인도네시아의 사이렌드라스에서 일정 시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후에 사이렌드라스 왕조가 메콩 강에서부터 수도까지 크메르를 공격했는데, 따라서 자야바르만 2세는 당시의 공격으로 포로로 잡혀 인도네시아로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790년을 전후해서 세력을 규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해 인드라푸라에 수도를 정한다. 그 후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게 되는데, 현재의 롤루오스 지역인 하리하랄라야로, 옮겨 오면서 제국의 기초를 쌓는다. 서기 802년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마헨드라파르바타로 이전하고, 자신을 만국의 통치자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과 새로운 크메르 제국의 성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앙코르 왕조 시대로 접어든다.

 

2. 수리야 바르만 2세 힌두교의 비슈뉴 숭상

사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삼촌과 전쟁을 벌려서 삼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는 앙코르 와트 마하바르타 부조를 통해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앙코르 와트를 만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왕으로 기억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후 사역에 지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앙코르는 참파의 침입을 받아서 잠시 멸망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앙코르를 있게 한 왕 이지만 또한 앙코르 왕조를 붕괴시키기도 한 왕 이다.

 

*참파*

참파는 베트남 남부에 있던 말레이 계통의 왕조로서 당시 상당히 동남아를 소란 스럽게 했던 왕국 인것 같다. 베트남의 왕을 죽이기도 하고 크메르를 위협해서 크메르 왕을 죽이기도 하고.. 크메르의 부조에는 항상 적대국으로 등장하고 결국 크메르가 승리한것으로 묘사되지만 그만큼 위협적 이었다는 반증이다. 이 왕국은 결국 베트남에게 복속되어서 철처히 파괴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됨으로서 지금은 남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3. 자야바르만 7세

진정한 앙코르의 왕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려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국내 반란과 참파의 침입으로 수도가 점령당하자 참파를 몰아내고 병합까지 시킨 왕 이다. 지금까지의 왕들과 달리 대승 불교를 숭상하여 앙코르톰 내부의 바이욘 사원에는 불상이 많다. 사실 당시 앙코르는 불교와 힌두교가 혼재해서 크게 차별을 두지 않는듯 하다. 대승과 소승의 차별도 없는 듯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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