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은 너무 늦게 죽고, 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죽는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하는 가르침은 여전히 이상하게 들린다.‘알맞은 때에 죽어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짜라투스트라는 “대부분의 사람은 너무 늦게 죽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들이 아무런 즐거움이나 노래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들의 삶에는 아무것도 꽃피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죽는 법을 잊은 것 같다, 그들의 삶에는 아무 희열도 달콤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살아간다, 그들은 육체를 포기할 용기가 없다. 그들은 불필요하게 살아간다, 마치 지구 위에 놓여진 무거운 짐처럼 말이다, 그들은 비생산적인 기생충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비생산적일뿐만 아니라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심하게 질투한다, 그들은 활력에 넘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비난한다.
너무 늦게 죽는 사람들은 비난자들이다, 그들은 소위 성자가 되고 성직자가 된다, 그들은 신성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로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 능력도 없고 죽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 대한 변명의 구실을 찾아야 한다, 세상을 비난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찾아낸 구실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삶은 무용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성적인 행위는 자살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에 수백 명이 자살했다, 그러나 그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했다, 그가 죽기 전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당신은 평생 동안을 사람들에게 자살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지성적인 행위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당신이 그렇게 오래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논이 말했다.“나는 오래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사람들에게 삶의 무용성과 무의미함을 가르쳤겠는가? 오랜 삶은 내게 고문과 같은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했다, 이 무의미하고 덧없는 삶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대단한 변명이다! 그 자신은 살아남기 위하여 훌륭한 핑계 거리를 찾은 것이다.
이 경우를 표본으로 삼으라, 누구든지 삶을 비난하는 사람은 가슴이 개발되지 않고 뿌리도 없는 불구자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아무 꽃도 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그의 복수심은 세상을 포기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모든 종교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삶을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의 기술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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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죽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실제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미 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70살에 화장될 것이지만 이미 30살 때 죽었다, 나머지 40년 동안 그들의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기간은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그 삶은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고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다, 그들의 삶에는 노래하며 흐르는 실개천조차 없다, 그들은 완전히 불모의 땅이 되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림, 시, 음악, 춤, 그 어느 것도 낳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서른 살 때 죽었다, 나머지 삶은 사후의 삶이다, 사랑 하기를 멈추는 날, 창조하고 성장하기를 멈추는 날, 엄밀한 의미에서 그대는 이미 죽은 것이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대는 계속 숨쉴 것이다, 그러나 호흡은 삶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숨쉬기만을 계속하는 자는 식물과 다름없다, 그는 양배추와 같다, 세상은 그런 양배추 인간으로 가득하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하는 가르침은 여전히 이상하게 들린다.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 강렬한 삶을 산 사람은 알맞은 때에 죽는다, 그의 죽음은 열매이며 수확이다, 그의 죽음은 완전한 성취이다. 그는 휴식을 원하는 시점에 올 때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사랑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즐겼다, 그는 창조적인 작업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의 삶의 잔은 가득 찼다, 이제 그는 지구 위에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이 가도록 운명지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아무런 금기도 없이 자연에 따라 사는 사람들, 혼신을 다해 아낌 없이 사는 사람들만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은 경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 있는 근원에 따라 사는 사람들, 그들은 ‘알맞은 때‘를 안다, 그들은 엄청난 성취의 희열에 도달했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의 완성이다, 써클이 완성되어 간다, 죽음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탄생을 가져다 준다. 알맞은 때에 죽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죽음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선입견으로 남을 것이다, 그 선입견 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개 인적인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짜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대가 가진 모든 잠재성의 실현 이다, 이젠 육체 안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미소를 머금고 즐겁게 죽을 수 있다, 그대의 죽음은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 99.9퍼센트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죽거나 너무 빨리 죽는다. 고타마 붓다가 죽던 날 아침,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없으리라, 이젠 떠날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 스승님은 다른 고장으로 옮기시려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붓다가 말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 말은 이제 육체를 떠나 겠다는 뜻이다, 내가 떠나기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소를 찾으라, 나 는 산속에서 그리고 나무와 새, 야생동물, 명상가들과 함께 아름답게 살지 않았더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두 그루의 사라수가 눈에 띄었다, 그 나무 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붓다가 말했다. “저기기 적당한 것 같구나, 나는 바로 저 나무들 사이에서 죽겠다.” 그는 죽음이 간단한 결정인 것처럼 말했다,
전체적인 삶을 산 사람 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의 결정이 된다, 죽음이 그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죽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와 육체를 빼앗고, 미완성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때, 그것은 고통스런 경험이 될 것이다, 그대의 자식들은 아직도 어 린아이이고, 끝마치지 못한 사업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죽음 의 노크 소리를 환영할 수 없다, 황제조차도 죽음을 환영할 수 없다, 아직 정복할 땅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욕심은 한계를 모른다, 욕 심은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죽음이 적처럼 보이는 이 유이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간단한 선택이 다. 그는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로 갔다, 그리곤 거기 앉아서 제자들 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나의 육체는 살만큼 살 았다, 이제 나의 육체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 나의 육체는 궁극적인 휴 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육체를 버리기에 앞서서, 너희들이 질문하 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하라, 너희들은 다른 스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울고 있었다,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말했다. “스승님은 42년 동안이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스승님은 저희들의 질문 모두를 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마음 편히 쉬십시오, 스승님은 저희에게 길을 보여 주셨고, 저희는 그 길을 따를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붓다는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나는 더 이상 육체가 아니다, 나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세 번째 단계 ...... 나는 더 이상 가슴이 아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 나는 나의 의식 안에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호흡과 심장이 멈추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 의 죽음이다, 너무나 쉽고 편안한...... 존재에 대한 감사로 넘치는... ... 붓다가 말한 이 단계들은 명상의 단계와 같다, 그것이 내가 “명상한 다면, 그대는 죽지 않고도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 다, 그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출전 : 오쇼 라즈니쉬 <오쇼의 짜라투스라> 중
너무 늦게 죽는 사람들은 비난자들이다, 그들은 소위 성자가 되고 성직자가 된다, 그들은 신성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진짜로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 능력도 없고 죽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 대한 변명의 구실을 찾아야 한다, 세상을 비난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찾아낸 구실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삶은 무용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성적인 행위는 자살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 중에 수백 명이 자살했다, 그러나 그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했다, 그가 죽기 전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당신은 평생 동안을 사람들에게 자살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지성적인 행위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당신이 그렇게 오래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논이 말했다.“나는 오래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사람들에게 삶의 무용성과 무의미함을 가르쳤겠는가? 오랜 삶은 내게 고문과 같은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했다, 이 무의미하고 덧없는 삶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대단한 변명이다! 그 자신은 살아남기 위하여 훌륭한 핑계 거리를 찾은 것이다.
이 경우를 표본으로 삼으라, 누구든지 삶을 비난하는 사람은 가슴이 개발되지 않고 뿌리도 없는 불구자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아무 꽃도 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그의 복수심은 세상을 포기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모든 종교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삶을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의 기술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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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죽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실제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미 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70살에 화장될 것이지만 이미 30살 때 죽었다, 나머지 40년 동안 그들의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기간은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그 삶은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고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다, 그들의 삶에는 노래하며 흐르는 실개천조차 없다, 그들은 완전히 불모의 땅이 되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림, 시, 음악, 춤, 그 어느 것도 낳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서른 살 때 죽었다, 나머지 삶은 사후의 삶이다, 사랑 하기를 멈추는 날, 창조하고 성장하기를 멈추는 날, 엄밀한 의미에서 그대는 이미 죽은 것이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대는 계속 숨쉴 것이다, 그러나 호흡은 삶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숨쉬기만을 계속하는 자는 식물과 다름없다, 그는 양배추와 같다, 세상은 그런 양배추 인간으로 가득하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하는 가르침은 여전히 이상하게 들린다.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 강렬한 삶을 산 사람은 알맞은 때에 죽는다, 그의 죽음은 열매이며 수확이다, 그의 죽음은 완전한 성취이다. 그는 휴식을 원하는 시점에 올 때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사랑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즐겼다, 그는 창조적인 작업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의 삶의 잔은 가득 찼다, 이제 그는 지구 위에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이 가도록 운명지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아무런 금기도 없이 자연에 따라 사는 사람들, 혼신을 다해 아낌 없이 사는 사람들만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은 경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 있는 근원에 따라 사는 사람들, 그들은 ‘알맞은 때‘를 안다, 그들은 엄청난 성취의 희열에 도달했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의 완성이다, 써클이 완성되어 간다, 죽음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탄생을 가져다 준다. 알맞은 때에 죽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죽음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선입견으로 남을 것이다, 그 선입견 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개 인적인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알맞은 때에 죽어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짜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대가 가진 모든 잠재성의 실현 이다, 이젠 육체 안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미소를 머금고 즐겁게 죽을 수 있다, 그대의 죽음은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 99.9퍼센트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죽거나 너무 빨리 죽는다. 고타마 붓다가 죽던 날 아침,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없으리라, 이젠 떠날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 스승님은 다른 고장으로 옮기시려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붓다가 말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 말은 이제 육체를 떠나 겠다는 뜻이다, 내가 떠나기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소를 찾으라, 나 는 산속에서 그리고 나무와 새, 야생동물, 명상가들과 함께 아름답게 살지 않았더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두 그루의 사라수가 눈에 띄었다, 그 나무 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붓다가 말했다. “저기기 적당한 것 같구나, 나는 바로 저 나무들 사이에서 죽겠다.” 그는 죽음이 간단한 결정인 것처럼 말했다,
전체적인 삶을 산 사람 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의 결정이 된다, 죽음이 그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죽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와 육체를 빼앗고, 미완성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때, 그것은 고통스런 경험이 될 것이다, 그대의 자식들은 아직도 어 린아이이고, 끝마치지 못한 사업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죽음 의 노크 소리를 환영할 수 없다, 황제조차도 죽음을 환영할 수 없다, 아직 정복할 땅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욕심은 한계를 모른다, 욕 심은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죽음이 적처럼 보이는 이 유이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간단한 선택이 다. 그는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로 갔다, 그리곤 거기 앉아서 제자들 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나의 육체는 살만큼 살 았다, 이제 나의 육체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 나의 육체는 궁극적인 휴 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육체를 버리기에 앞서서, 너희들이 질문하 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하라, 너희들은 다른 스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울고 있었다,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말했다. “스승님은 42년 동안이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스승님은 저희들의 질문 모두를 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마음 편히 쉬십시오, 스승님은 저희에게 길을 보여 주셨고, 저희는 그 길을 따를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붓다는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나는 더 이상 육체가 아니다, 나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세 번째 단계 ...... 나는 더 이상 가슴이 아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 나는 나의 의식 안에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호흡과 심장이 멈추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 의 죽음이다, 너무나 쉽고 편안한...... 존재에 대한 감사로 넘치는... ... 붓다가 말한 이 단계들은 명상의 단계와 같다, 그것이 내가 “명상한 다면, 그대는 죽지 않고도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 다, 그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출전 : 오쇼 라즈니쉬 <오쇼의 짜라투스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