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채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가르켜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이라고 평가를 했다. 낭불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로 보셨던 것이다. '역사는 관점이다'라는 인식에서 접근하면 참으로 탁월한 식견 이다.

글로벌 의미에서 보수주의란 근대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를 가르키면서 사회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성향이나 태도를 가르키는 용어 이다.  물론 심리적의미의 보수와 정치적 의미의 보수가 반드시 일치하는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수란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보수주의 란 '국수주의'와도 상통 한다. 그래서 '보수주의' 하면 대게 외세를 배척하고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하기 마련인것으로 여겨진다. 극단적인 예 이지만 대표적으로 '나찌'와 '파시즘' 그리고 'KKK 단'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느끼게 된다. 글 전반적으로 묘청은 진보주의자 김부식은 보수주의자로 대립각을 세우지만,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대 사대당의 싸움으로 말씀 하시면서, 진보주의자인 묘청을 국풍파 독립당으로 보수주의자인 김부식을 한학파 사대당으로 비견을 하신다. 우리가 이해하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 비춰 볼때 뭔가 좀 색다른것 같다.

요는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의미는 글로벌 의미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한국에서 등장 하게 된다.  한국의 보수를 논 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이 시기를 우리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삼국중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를 성립한 정치적 후진국이었으면서도 삼국을 통일한 나라. 또한 골품제과 신분제로 기득권층에 대한 보호장벽이 가장 철저했던 기득권 옹호의 나라. 그런 신라는 자주적이 아닌 방법으로 외세를 동원해서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나마 영토적으로는 반쪽의 삼국 통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정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역사 발전의 단계가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고대국가에서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 하는것이 일반적이라면 신라의 삼국 통일 덕분에 우리는 이런 중앙집권 국가를 고려성종이후에나 경험하게 된다. 고려 성종에 이르러 지방관의 파견이 시작되었고, 훨씬 이전의 백제가 나름대로 22담로를 파견하면서 지방통제를 시도한것에 비춰보면 신라는 통일 이후에도 중앙에서 감찰관을 파견해서 통제 했을뿐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지는 못 했다. 물론 그런 여건과 이유는 조금 후에 다시 언급 하겠지만, 지방관의 파견 여부가 중앙집권 국가로의 발전에 대한 중요한 판단기준임에 비춰 정치적으로 가장 후진적이었던 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의 역사 발전단계를 상당히 늦췄다고 본다.

신라는 통일 이전에도 그랬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수도를 계속 경주로 고집했다. 그리고 골품제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천도'란 기득권과의 결별을 의미 한다. 삼국을 통일 했으면 통일국가를 아우를만한 천도를 단행하고 골품제에 대한 점검이 필요 했다. 훨씬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가 나름의 사정에 의해서 몇번의 천도를 했건만 신라는 통일 이후에도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 보다도 통일국가 였음에도 의식구조는 여전히 옛 신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라는 겉으로는 율령등을 반포해서 고대국가를 성립하고 삼국을 통일한 국가였음에도 골품이 지배하는 부족국가적 색체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정치 후진국 이었던 것 이다. 그래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마디로 통일 할 수 있는 역량이 제대로 안되고 통일에 대한 비전과 정치성숙도가 가장 떨어진 나라에 의한 통일 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주적 역량에 의한 통일이 아니었기에 통일국가를 완전히 통제(통일 신라의 경우 지방 통제 제도가 아주 많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통제 하지 못했다는것을 의미 한다.) 할 수 없었고 이런 현상은 어느정도 지방토호들의 권위를 인정 해야 통일 국가를 유지 할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9주 5소경등의 제도가 있었지만 강력한 힘에 의한 통일이 아니었기에 통일국가 전체에 대한 통제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신라로서는 천도는 엄두도 못내고 골품제의 기득권이 보호를 해 주는 경주를 벗어 날 수 없는 국가가 된것 이다.

무엇보다 고대사회에서 신분제는 당연한것 이겠지만 유독 신라는 당시 기준으로도 가장 견고한 신분제를 유지 해 왔다. 반도의 구석에서 대륙의 거센 풍파를 받아보지 못한 신라로서는 당연히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신분제가 유지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삼국중 강력한 신분제를 지닌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은 우리의 역사발전 단계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야기 했다. 후진적 산물(당시에는 보편적인 신분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분간 이동이 불가능 하다는 의미에서)인 골품제로 인해 백제계와 고구려계의 출세를 제약함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로 거듭 날 수는 없었던 것 이었다.

만약에 신라가 스스로 강력한 힘에 의해 통일을 달성했다면 어떻게 됬을까? 강력한 힘에 의한 통일국가가 지향하는 통제의 방향은  법치 이다.  당시 기준으로 강력한 힘이란 곧 강력한 왕권을 의미 하고, 강력한 왕권은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힘을 지닌 왕은 귀족이나 토호들을 통재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법치를 실현 시킬 수 밖에 없다. 물론 강력한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겠지만 법치는 합리를 지향 하기 때문에 명분도 좋다. 진 시황이 좋은 예이다. 이런 역사 발달 과정상 신라가 강력한 힘에 의해 통일을 이룰 역량이 되었다면 그 이전에 왕권이 귀족을 제압 했을것이고 골품제는 무력화 됬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그런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삼국을 통일 할 만한 자주적 힘이 없었다. 결국 당시의 신라의 역량으로는 아직 자주적 통일을(통일전쟁 직후 당나라를 무력으로 축출했다고 해서 자주적 일 수는 없다) 이룰 힘과 능력, 비전 모두가 없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법치국가에 반해 지방 토호들이나 귀족의 힘이 강한 사회를 통제하는것은 권위주의 이다. 요즘에도 아프칸이나 파키스탄의 오지에 가면 토호들이 전권을 행사 하지 않는가. 법 보다는 토호의 말 한마디가 실생활을 지배 한다는 의미 이다.  이런 권력은 당연히 세습 하게 되고 깨어지기도 힘들다. 그런식으로 시간이 지나다 보면 권위주의는 보수화 되기 마련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를 거부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통일 이전의 신라 이다. 그래도 이렇게 발전한 보수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적이기 마련이다. 통일신라의 경우도 차라리 계속 이렇게 발전 했으면 좋을뻔 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적 보수로도 발전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당을 축출하기는 했지만 문화적 영향까지 결코 벗어 나지는 못 했던 것이다. 기득권이 외세와 결합했다는것은 기득권이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전통적 의미의 보수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기득권 옹호' 자체에 머무는 '기득권 보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장 후진적인 국가였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통일국가라는 좋은 기회를 가졌음에도 골품제도의 개혁이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왜곡된 보수의 근간을 남기게 된다. 이런 기조는 그후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선되지 못했다. 문화라는것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이때부터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이 우리문화에서 사라지게 되고(본론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고구려의 패망은 내분과 외교 정책의 실패로 본다. 외교적으로 돌궐과 결합해서 끊임없이 당을 압박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백제의 자유분방한 세련됨이 말살되어 갔다고 여겨진다. 한마디로 자주 보다는 사대의 풍조가 세습되는 문화 유산을 지니게 된것 이다.

통일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잠시 소원한 관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글로벌 추세에 맞춰 신라와 당은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별 거부감 없이 당시 선진문물이었던 당의 문화가 유입되게 된다. 특히 출세에 제약이 있는 6두품을 중심으로 수입된것중의 하나가 유학이다.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기실 유학을 수입해서 고구려는 태학을 설치한바 있고 백제는 박사제도를 둔 적이 있다. 하지만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것은 통일 신라 이후 이고  이들 신라계가 고려 성종이후에는 대대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것이 정설이다. 물론 신라의 유학자들은 신라시대에는 신분제라는 기득권에 눌려 정치적으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 신라의 유학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세력의 뒷받침이 필요한 왕권의 비호 아래 안정적으로 이땅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 신라의 기득권 옹호의 문화와(차별 받은 6두품의 아픔을 털어낼것 같지만 문화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함께 말이다. 사실 유학의 중심 사상은 '충' 이다. 정치지도자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고대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당시의 전통세력은 지방이나 귀족 세력 이었지만, 고려처럼 어느정도 중앙집권이 확립된 사회에서는 중앙이 전통 세력이 되는것이다. 지방 세력은 이미 기득권을 잃었기 기득권 세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차별세력 이었던 신라 유학세력이 고려에 이르러서 중앙 기득권 세력이 되서 또다른 세력을 억압 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등장한것이 바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다. 물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실패를 했다. 개혁 세력이 꺽인것이다. 신라 시대 골품제에 의한 6두품의 차별이후 고려시대 또 한번의 개혁세력의 실패를 경험 한 것이다. 아이러니는 신라 시대에 차별 받았던 신라 유학 세력에 의해 새로운 개혁 세력이 평정 됬다는 것이다.

그래도 고려 초기에는 자주적 보수 세력의 싹이 보였다. 북진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강동 6주의 개척, 거란과의 항쟁, 9성축조....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신라계 유학자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부터, 국외적으로는 당송의 문화가 절정을 이루면서 부터, 고려는 자주성을 잃고 경직되기 시작 했다. 그래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는 개혁세력의 실패가 비일비재 하게 발생 되었다. 노비의 난, 공민왕의 개혁 실패... 잠시 조선의 건국이라는 개혁 세력의 큰 성공이 있었지만 이 역시 곧바로 정도전의 숙청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결과를 얻게 된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도 역시 개혁의 실패는 이어져 왔다. 사림의 실패로 귀결되는 사화, 실학의 실패, 정조의 개혁 실패, 동학운동의 좌절.... 한마디로 한국사회에서 개혁의 성공은 1천년 이래로 거의 전무 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니 한국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으로 진화 할 수밖에 없었을까? 보수적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게 된것이 우리 사회 인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우리의 피속에서 개혁적 유전자는 서서히 모두 제거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왕조의 교체는 약 200년 주기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우리는 약 500년 주기로 그런일이 있어 왔다. 왕조교체가 지니는 의미는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을 의미 하고 이는 변화와 개혁을 의미 한다. 즉 우리는 중국에 비해 좁은 나라이고 또한 기득권이 완고한 나라라는 의미 이다. 사극에서도 왕이 무슨일을 하려고 하면 신하들이 똑 같이 말하지 않는가. "아니되옵니다. 전례가 없는 일 이옵니다."  전례는 무슨..... 우리는 전례가 없으면 새로운 시도는 잘 못 하는 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하긴 주희의 성리학을 다른 학문의 수혈없이 500년동안 정책의 근간으로 이어 왔으니 이쯤에 이르면 보수가 우리 DNA속에 각인된 정도를 더이상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런 현상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였다. 일제 강점기를 겪게되는 과정도 물론이거니와 해방 이후에도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지 못 했다. 아주 오래된 숲에는 적당한 시기에 번개가 치고 불이 나야 새로운 나무들로 숲이 건강해 지는 법이다. 이것은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 이다. 적당한 기회에 기존의 기득권이 청산이 되어야 새로운 가치로 인해 사회가 건강해 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것들은 너무 자주  발생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숲이 포화 상태에 새로운 나무의 성장에 장애가 된다면, 적당히 번개가 내리쳐 불이나고 커다란 나무들을 솎아 주어야 하는것이 자연의 이치 인것이다. 그럴 수록 숲은 더욱 건강해 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출발은 한국사에 번개가 내리치는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기득권 청산'을 하지 못함으로 또 한번의 기회를 놓쳐 버린 사건 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뉴라이트 연합' 이라는 단체가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기득권 옹호 집단'에 불과 하다. 분명 정치적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란 자주적 성향을 띄기 마련 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주 보다는 강한 친미 친일적 성격을 들어낸 바 있다. 물론 친미나 친일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보수를 표방 한다면 우리의 국익보다 우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보수로서 정체성이 없다. 한가지만 예를 들면, 객관적 입장을 취한답시고 그들이 만든 역사 대안 교과서라는 것이 있다. 역사에서 진정한 객관이라는게 어떤것인지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관점'이란 사실을 피력한 바 있다. 쉽게 말하 자면 역사란 자기관점으로 들여다 보고 해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이다. 역사라는 것도 사람이 만들고 따라서 역사 자체가 관점의 충돌 인것이다. 결국은 어떤 사람 일지라도 전체의 관점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를 관찰하는데는 주관이라는것이 필요하게 되고 그 주관적 관점에 의해서 역사적 성격을 규정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객관이란 미명으로 역사를 포장하지만, 사실 역사의 해석에서 다수의 동의는 있어도 절대시 되는 객관이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리 하자면 한국은 역사속에 보수를 각인시켜 왔고 늘 보수의 성공만이 있어 왔다. 그 결과 한국은 대단히 보수적인 나라가 됬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어서 글로벌 의미의 자주적 '보수주의'로 성장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한국사에 등장했던 모든 보수는 외세와 결탁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보수 였다. 멀리로는 신라의 삼국 통일 세력으로 부터 고려의 권문세족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대한민국의 군사 쿠데타 세력..... 그들에게서 전통을 고수 한다는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옹호 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나마 이것은 자연스러운 심리 이다. 하지만 우리의 보수는 거기에 더하여 외세와 결탁했으니 국가주의가 성장 할 리도 없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세력 에게는 국가주의도 없고 보수주의의 개념도 없는 것이다. 정말로 보수적인 나라, 그러면도서 보수주의 개념 조차도 없이 기득권만 존재 하는 나라! 우리는 대단히 보수적인 나라 이면서도 진정한 우익이나 건강한 보수를 한번도 지녀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간절히 우리에게 그런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존재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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