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행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체코로 향하고 있다. 프로펠러 비행기라는데 생애 가장 작은 비행기가 아닐까 싶다. 40인승인데 좌석이 무척 좁다. 그래도 좋았던것은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고도도 높지 않고 지상의 많은것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아침에 호텔에서 넣어준 도시락을 챙겨 넣고 카메라도 지상의 모습을 촬영했다.

작은 비행기라도 할것은 다 하는지 기내식도 나온다. 다만 공장에서 마춤형으로 준비한듯 요구르트에 후르츠 칵테일, 그리고 빵정도 이다. 저녁때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인데, 마침 지원이 녀석이 딱 좋아하는 스탈이라 가방에 챙겨 넣고, 나는 호텔에서 넣어준 도시락으로 아점을 때웠다.

독일에서 떠나오면서  텍스트 프리(bloomingdales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텍스 프리가 문제 였는데, 기준이 영 헷갈리게 했다. 처음에는 체코에서 유럽연합을 떠나는 나라에서 텍스트 프리(bloomingdales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텍스 프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가, 어느곳에서든 해도 좋다고 하는데 이게 영 헷갈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로화로 받기 위해서는 독일에서 하는게 유리하다고 해서 이곳에서 했다. 다음에는  텍스트 프리(bloomingdales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텍스 프리 에 관한 조사를 한 다음에 여행을 출발 할 필요성이 있다.

출발전 체코에는 소매치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교묘히 빼가는 정도는 아니고 그냥 한눈 팔고 있을때 가방 끌러서 빼가는 정도라고 한다. 물론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외국 여행중에는 '밤에 나다지지 말것'과 '가방은 앞으로 하고 다닐것' 이런것과 관련지어 누가 친철하게 말을 걸어도 '절대 대꾸하지말것' 정도는 기본으로 신경쓸 필요가 있을것 같다. 아무래도 몇일 지나가는 나라를 그 기간동안에 제대로 알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공항은 의외로 한적하고 조용했다.

유럽 중세의 건축 양식

로마네스크 : 10C 말에서 12C초(지역에 따라서는 13C)까지 발달.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로마 양식이란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켈트나 게르만적 전통을 기반으로 동방의 영향과 로마의 전통을 흡수 하면서 발전한 양식이다. 그로인 궁륭(볼트, 반원형 천장)이 특징이며 이것 때문에 하중이 크고 기초부에 있어서 하중이 곁 바깥의 방향을 취하기 때문에 벽체는 두텁고 견고해야 했고 따라서 창도 크게 할 수 없었는데 이것이 로마네스크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로마네스크 건축에 특유한 중후한 외관과 어둑한 내부 공간이 생겼다. 정리 하자면 육중한 특질, 두꺼운 벽, 둥근 아치, 튼튼한 기둥, 그로인 볼트, 큰탑과 장식적인 아케이드아 특징 이라고 한다. 모든 건물이 명확히 정의된 형태이며 대부분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평면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뒤에 나오는 고딕보다는 상당히 단순한 형태. 10유로의 전면에 나오는 건축 도안은 둥근 아치 형태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 형태 이다. 또한 후면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다리의 모양이다.


고딕 건축 :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고딕양식이 그 돌파구를 여는 것은 성당건축에서인데, 건축가들에게 최대의 난제가 된 것은 점차로 높이를 더해가는 석조궁륭의 가구법(架構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시는 하늘과 좀더 갑게 올라가기 위하여 높은 첨탑을원하고 높은 천장을 원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상의 안정을 확보하면서 상승성(上昇性)을 유지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은 리브(늑골상아치)궁륭과 첨단(尖端)아치이다. 즉고딕식 성당 건축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構造技術上)의 3요소(要素),즉 지골궁륭(支骨穹:ribbed vault)·버팀도리[飛樑:flying buttress]·첨두 아치(尖頭 arch)에 단적으로 보인다. 이것들의 조직적인 적용으로 말미암아 형태에 있어서는 앙고성(仰高性) 또는 상승감(上昇感)이 강조됨과 함께, 구조상에서는 사압력(斜壓力)이 크게 경감(輕減)된다. 이 3가지 요소는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이런 것은 동방 기원(東方起原)임이 틀림없다.  20유로짜리 지폐의 전 후면 도안이 고딕 양식을 나타낸다. 첨두아치의 창문과 다리....ㅋㅋㅋ

르네상스 건축: 고전문예의 부흥을 기치로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발생하여 유럽 전역으로 전파. 그래도 이탈리아 중심으로 보면 된다. 특징은 반원형 아치, 원통형 볼트, 돔이 다시 사용되었다. 로마네스크와 구별되는것은 벽체와 구조체를 합리적인 조합원칙에 연관시켜 결합하려 했으며 석재의 재질감을 살리고 돌림때를 사용해 수평성을 강조한게 특징이다. 실제 구조는 조적식 구조이면서 외부 입면에는 가구식 구조로 표현 했고 돔은 시공성 경량화 아름다운 외관을 위해 골조 구조를 채택했다. 이런 특징은 르네상의긔 실용적 정신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질서, 균형, 조화에 의한 형태미를 강조한게 특징이며 외벽의 경우 벽면을 거칠게 마감하여 재질감을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유럽게 가서 단순한 아치 보다는 아치 테두리에 뭔가 수평성을 강조한 장식을 했다면 르네상스 이다. 50유로짜리 지폐의 문과 다리가 르네상스 양식이다.

바로크 로코코 : 다양한 바로크 양식중 대표적인 흐름이 로코코이다. 프랑스에서 태동했으며 베르사이유 궁전이 대표적이다. 우아함을 추구하는 양식이다. 100유로짜리 지폐를 보라.. 이게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다. 다리에서 아치도 길게 옆으로 늘어 뜨리거나 기둥이나 문에 세련된 장식들이 붙어 있거나... 웅장함 보다는 우아함이 돋보인다면 바로크로코코를 생각하라.

이상이 중세와 근세에 유럽 건축 양식이라고 하는데 사실 매우 어렵다. 시대에 따라 혼재하기도 하고....암튼 프라하는 유럽 건축 양식이 골고루 나타나는 건축 양식의 백화점과도 같았다.

체코의 기원

이 나라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6세기경부터 슬라브인이 정착해서 살게 되는게 기원입니다. 9세기경 부터 프랑크왕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9세기 후반 프르제미슬 왕조의 보르지보이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분의 손자가 바로 바츨라프 1세인데 보헤미아를 기독교화 하는데 노력한 공로로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기에 이릅니다. 지금도 체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선한 왕, 바츨라프’는  지덕을 겸비한 통치자로서 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한 가난한 농부가 길거리에서 땔감을 줍는 모습을 보고, 직접 땔감과 먹을 것을 짊어지고 눈보라를 헤치고 농부의 집을 찾아갔다는 바츨라프 왕의 일화도 전래하는 왕 입죠.

체코의 왕 중에서 가장 알려진 왕이 바로 바츨라프 1세와 카를 4세 인데 바츨라프 광장에 세워진 동상이 바로 바츨라프 1세 인데 바츨라프 1세는 성군이면서 체코를 부흥으로 이끈 왕이기도 하지만 불행히도 동생인 볼레슬라프에 의해 암살 당했는데 비투스 성당에 유해가 있다고 하는데 일정에 너무 쫒겨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후 바츨라프 3세가 후세 없이 암살 당함으로서 프르제미슬 왕조대신 룩셈부르크왕가가 체코를 지배 하게 되는데 이 왕가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바로 체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를 4세 입니다. 이 두사람에 의해 지금의 체코가 거의 먹고 사는듯..... 암튼 카를 4세에 이르러 체코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 하지만 그후 바츨라프 4세에 이르러서 황제권을 두고 교황과의 반목을 겪게되며 바츨라프 4세가 실각하고 지기스 문트가 후세 없이 사망하자 체코는 결혼에 의해 사위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세속되게 된다. 바츨라프 4세때 교황과의 대립으로 신교가 활성화 되었는데 이때 황제군과 보헤미아의회,신교도 연합군이 후스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승리한 황제군에 의해 합스부르크 왕권이 강화 되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에 귀속 되게 된다.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분리 될때까정 쭉 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프라하 비투스 성당

프라하 성의 중앙정도에 위치하며 왕궁 뒷편에 있다. 왕궁에서 근위병들의 교대식도 이국적이어서 우리에게는 특이하다. 흥미로운것은 왕궁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는데 평상시에도 관광객에게 개방된다고 한다. 들어가는 방향으로 우측이 집무실인데, 집무실 지붕에 깃발이 꽃혀 있으면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는것이고 깃발이 없으면 대통령이 없는것이다. 또 왕궁 의 정문 위에는 합스부르크에서 체코인을 제압하는"싸우는 거인상"이라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것도 특징이다. 물론 현재 이곳에 있는것은 복재품 이라고 한다. 원본은 아마 후스전쟁과 관련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세운 모양이다. 체코인에게는 굴욕적인게 깔린 사람은 눈을 조각하지 않았다. 감히 합스부르크가를 쳐다 보지도 못한다라는 의미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이것을 보존한다고 한다. 사실 유럽에서 이런 현상를 굴욕이라고도 할 수 없는게 체코가 오스트리아에 넘어가게된 과정은 전쟁이 아니라 혼인에 의한 상속 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통합이었지만, 나중에 후스파에의해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결국 전쟁을 하게 되고 왕궁에 굴욕을 세기게 된것이다.

이 왕궁을 돌아서 뒷편으로 가자 웅장한 성당이 보인다. 1344년 카를 4세에 의해 짓기 시작하여 1929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건축기간이 600년이다 된다. 로마네스크에 고딕양식이 가미된 이 성당으로 인해 프라하 성이 완결된 구조를 이루었다고 보여진다. 첨탑 부분의 경우 여러번 바뀌었으며 16세기 중엽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그 100년뒤에는 양파모양을 한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으며 1929년에 신 고딕 양식인 현재의 형태를 취했다고 한다. 외관에서 악마의 형상을 한 물받이가 인상적이다. 들어갈때는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나온다

성당 내부에는 무덤으로 사용된는데 체코의 여러성인들의 무덤이 있다. 카를교로 유명한 네포묵 신부의 무덤(순 은으로 되어 있다고 함)다. 무엇보다 웅장한 내부 모습과 스테인글라스가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저기 관광객이 너무 많다. 소매치기 조심...^^ 언제 봐도 리브볼트(이게 고딕의 특징이다)의 유려한 선은 넘 멋있다. 특히 스테인글라스에 대해서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는데 가장 유명한것은 정문 입구의 '장미의 창'과 성그리스도와 성메토디우스 스테인 글라스는 아르누보 호가 알폰스 무하의 1927년 작품이다. 나머지 아르누보 화가의 스테인 글라스들도 몇개 있는데 아까 말한 두개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나머지 것들도 관찰하면 아름다운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도 장미의 창 아래에 있다. 이 성당 내부를 돌아 밖으로 나와서 황금소로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가다보면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 건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의회파 사람들이 황제파 신부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황금 소로

성당을 돌아 동쪽 끝 부분에 오면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가 있다. 처음에는 성의 보초병들이 살기 위해 지은것으로 처음에는 작은집이었으나 시대를 지나면서 길게 증축되고 2층으로도 건설 되었다고 한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신비주의와 연금술에 빠져 살았던 합스부르크 괴짜 황제 루돌프 2세에 이르러서 연금술사와 금은 세공사들이 살기 시작 하면서 황금소로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보면 중세 시대의 투구 장신구등을 전시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것은 '카프카' 때문인데 이골목 22번지 집에서 매일 글을 쓰고 밤이 되어서야 하숙집으로 돌아 가곤 했는데 그때 프라하 성에서 모티브를 얻은게 '성'이란 작품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카프카의 집도 인상적이 었지만, 마리오네트 인형을 하나 사고 싶었는데 못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체코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독일어를 사용하게 하는 정책을 폈었는데 이때 체코 사람들은 언어 대신 이 인형을 통해서 체코어를 보존하게 했다고하고 그때 부터 체코에서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유명해 졌다고 합니다. 사고 싶었지만 사람키만한것들은 너무 비싸서 못 샀어요. 10만원이 훌쩍 넘으니... 유로화가 장난이 아니게 비싸서..ㅠㅠㅠ. 그 대신 보헤미안 목각인형을 2개 사왔습니다.

오를로이 천문 시계

2차 세계대전때 시청사가 많이 파괴 되었는데 이 시계탑은 다행히 화를 면 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이 시계탑은 시청사에 딸린 부속 건물 이었던것 같다. 이 시계탑에는 전설이 있는데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시계를 오직 프라하에서만 볼 수 있게 하려는 욕심때문에 시의원들이 누명을 씌워서 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한번만 시계를 만져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서 그 시계에 들어가 중요한 부품 하나를 없애고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천문 시계의 바깥원은 하늘색, 갈색, 검은색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늘색은 낮과 하늘을 상징하고 갈색은 땅 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중 오른쪽 갈색은 초저녁, 왼쪽 갈색은 새벽을 상징하며 검은색 부분은 밤과 달을 나타 낸다고 한다. 천문시계의 양쪽 원은 태양, 달, 북극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종교적 메시지도 전해 지는데 매시 정각이 되면 천문시계 오른쪽의 해골 인형이 줄을 당기며 모래 시계를 뒤집는 동시에 위에 있는 파란색의 작은창 2개가 열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정확히는 11제자와 사도 바울)의 밀랍 인형들이 지나 간다. 다 지나가면 바로위의 황금닭(베드로의 닭)이 울리면서 종을 치게 된다.

천문시계 양옆으로 있는 4개의 인형들은 왼쪽부터 각각  허영, 수전노, 유대인, 죽음,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고 있으며 줄을 당기는 해골인형은 죽음의 시간이 도래 했음을 알리며 회개 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고도 한다. 천문시계 밑은 칼렌다리움 이라고 하는데 12달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성명일을 해당하는 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헤미아 농부들의 계절에 따른 농사 모습이 나타나 있고 12궁도의 별자리와 중앙에는 프라하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다. 칼렌다리움 양 옆으로는 4개의 인형이 있는데 중세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던 직업을 상징하며 왼쪽 부터 수학자, 수호천사, 천문학자, 철학자 라고 한다.

틴성당

천문시계에서 우측을 보면 틴 성당이 보인다. 아름답고 독특해 보였다. 얼핏보기에 첨탑으로 보아 고딕양식으로 보이는데 특이하게 내부는 바로크 양식이라고 한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고 멀리서만 봤다. 이곳에는 루돌프 2세을 위해 일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인 티코 브라헨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의 관측 자료로 케플러가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 했다고 한다. 첨탑에는 황금 성배를 녹여 부착한 성모 마리아 상이 빛나고 있다. 가장 독특해 보였다.

여기서 또 감명을 받은것은 틴 성당이 유명한데 시계탑쪽에서 보면 작은 건물 하나가 가려서 성당이 보이지 않는다.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건물 같은데 유명한 건물을 가리기에 저건 무어냐고 물었더니 무슨 유서 깊은 초등학교인지 뭔지 된다고 한다. 다른 쪽으로는 미큘라슈 성당도 보인다. 지붕이 둥근 바로크 양식....

카를교

바츨라프4세가 체코를  통치 하고 있었을때 이 왕의 왕비가 프라하 성당의 네포묵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엿듣게된 신하가 이것을  왕에게 고해 바쳤답니다.  사실 성사의 내용인즉 왕비가 성안의 위병과 통정한 사실을 고해하는 내용이었는데 왕은 왕비에게 묻지 않고 네포묵 신부에게 물었답니다.  하지만  아시다 시피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네포묵 신부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대답을 거절 했지요. 바츨라프 4세가 몇번의 회유와 협박을 했지만 신부는 요지 부동 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바츨라프 4세는 네포묵 신부를 투옥해서 혀를 뽑아 버리고 돌로 묶어서 블타바강 까를교 위에서 물에 던져 수장 시키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자 카를교 밑에서 5섯개의 빛줄기가 올라 오게 됩니다. 그 빛줄기를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밑을 조사 하자 신부의 시신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후로 부터 네포묵 신부가 빠지게 된곳과 네포묵 신부의 동상이 세워진곳에 고해 성사를 하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태어 나게 됐습니다. 소원을 비는 방법은 이미 포스팅한 관계로 여행 스케치에서는 생략...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문화 유산으로 지적 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 였습니다. 성에서 바라보는 정경도 그렇고..... 이제 카를교를 지나서 바츨라프 광장으로 가게 되는데 너무나 잘 보존된 모습에 어떻게 오랜 세월동안 잘 보존이 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가이드씨가 이렇게 대답 하더라구요. 체코 사람들은 신중하고 사려가 깊어서 강한 적들이 침입해 오면 금방 항복해 버린답니다. 그래서 2번의 세계대전에서 유물들을 고스란히 지켜 낼 수 있었고, 또 유럽에는 천재 지변이 아주 적으며, 유럽안에서 전쟁을 할때는 유물의 파괴를 최대한 줄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관광자원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1년에 1억명의 관광객을 유치 한다고 하네요. 참 프라하 공항은 EU국가간에 운행하는 공항과 그외 나라로 출입하는 공항이 있는데 아주 소박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1억명 이란 소리에 뒤로 자빠졌지 뭡니까? 우리 영종도는 얼마 일까?

카를교의 화약탑을 지나서 조금 더 가면 금은 세공품이 진열된 시가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첼레트나 거리이다. 기념품으로 유명한데 과거에 프라하 성까지 왕의 행렬이 지나던 곳 이라고 한다. 기념품은 고가 위주로 판매 한다. 마리오네트 인형도 있고 귀금속도 많다. 이곳을 지나면 바츨라프 광장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외국인이라니.... 바츨라프의 동상이 있는데 까지는 한참 인데 좌판에서 맥주를 사들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려 보았다. 보헤미안 크리스탈도 구경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어째 맥주 2잔에 속은 느낌.... 하여간 외국에 나오면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니까... 말을 못하니 사람 어눌해 보이지...

바츨라프 광장의 끝에 있는 건물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된다고 하는데, 프라하의 봄과 관련있게 지금도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고 한다. 프라하의 봄에 희생 되었던 두 젊은 청년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이 사람들은 참 대단한게 바로 현장에다 무덤을 쓸 생각을 하다니... 우리도 광주의 도청앞 광장에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어떨가 싶다. 이것으로 체코의 여행이 모두 마무리 되었다. 오를로이 천문 시계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에 유서 깊은 교회와 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한식당이 있는데 간만에 맛있게 포식한 고등어 조림도 생생하지만 이제 프라하를 떠날 시간이다. 한국으로 돌아 오는 길에 보이는 프라하의 야경이 정말 아름답다. 이번 여행은 지는 태양을 쫒아 날아 갔다가 뜨는 태양을 향해 날아온것 같다. 창밖이 눈부시다... 굿바이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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