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 시장과 음악가의 묘지

오늘 오전엔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시트라우스 부자.. 등이 묻혀 있는 음악가의 묘지를 가는 길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완전히 한산하다. 묘지에 가는길에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 있길레 물어 봤더니, 일종의 동네 벼룩시장 같은곳 이라고 한다. 각자의 차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판다고 한다. 아이들도 이런곳을 통해서 자기 장난감을 내다 파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서 경제 감각도 키우고 물건의 소중함도 깨닫는다고 한다. 사용 하면서도 관리를 잘해서 팔아야 그나마 내다 팔 수 있을테니 이치에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곳의 1/5은 중국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새 물건을 이곳 헌 물건보다 싸게 팔아 버리는데, 그래서 벼룩시장의 의미가 많이 퇴색 됬다고 한다. 뭐 일종의 중국물건 판매장 처럼 된 모양이다. 그래서 인지 요즘엔 교육적 의미라든지 문화적 의미가 많이 퇴색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중국인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중국이란 나라가 워낙 거대함으로 인해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면에서 부작용은 이곳도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예전에 우리나 일본인들도 조잡한 물건을 만들때가 있었지만, 우리나 일본의 경우 규모가 적으므로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지만 중국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이나 나라가 나쁘다기 보담 규모가 압도 하므로 영향도 워낙 크므로 그들이 거대하다는점은 중국인들도 주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들은 매장문화에서 '가족장'이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우선 땅을 3M 정도 판 다음 시신을 관을 안치하고 위의 공간은 남겨둔다. 그리고 그 다음 가족이 죽으면 그위에 안치하고.. 이런식으로 하면 한 평도 못되는 공간에 5명 정도까지 안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5명이 다차고 그 모두의 시신이 썩으면 그 뼈를 모두 추려서 맨 아래로 내리고, 그 다음 같은 방식으로 계속 매장하는 방식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경한 문화(시아버지 위에 아들이나 며느리 관이 올라가게 되는 형국이니..) 이겠지만, 요즘처럼 묘지문제가 심각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가치관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시립 공동묘지에 있는 음악가의 묘지는 베토벤이라 모차르트등의 유명세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소박했다. 이곳 사람들의 합리적인 세계관을 이곳에서도 느꼈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워낙 유명인이라서 한 사람이 묘지 하나를 사용하는것이지 일반인들은 그나마 그렇지 못하는것 같다. 이곳의 장례문화는 매장 50% 화장 50% 정도 이고 매장은 처음에 시립묘지에 안치하는 비용이 300만원 정도 이며 그뒤 30년 마다 50만원정도의 추가 비용이 있다고 한다. 물론 30년뒤 비용을 내지 못하면 묘지를 없앨수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독특한 장례문화 때문에 묘지가 모자라지 않아 아직 그런일은 없다고 한다.

대가와의 만남.. 나야 사실 문외한이지만, 이런 나마저 잘 알 정도로 유명한 분들이 아닌가? 베토벤, 모차르트, 시트라우스, 슈베르트.... 이곳에 와 보면 비엔나가 왜 음악의 도시 인지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모차르트의 시신은 찾을수가 없어서 가묘 상태 라는데, 왜 그렇게 천재들의 삶은 고달픈지... 위의 여러분들중 한분이라도 편안한 삶을 사신분은 없다. 어쩌면 그들의 고난과 역경 있었기에 우리들의 영혼이 정화되는 그런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도 싶다. 사후에 마저 소박한 그분들의 묘를 보며 또한 감동을 느끼지 않은가...

센 부른 궁전

합스브루크 왕가의 여름 궁전이자 사냥터라는 곳이다. 1612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도중 발견한 아름다운샘에서 그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마티아스 이분은 30년 전쟁 그리고 체코와 관련해서 알았던 분 같다. 센부른 궁전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축소판으로 알려 졌는데 30년 전쟁의 이면에는 프랑스와 알력이 숨어 있었기에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크게 설계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비용이 없어서 지금 같은 크기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뒤의 정원과 넵튠 분수 그리고 글로리테(일종의 개선문)위치 까지 궁전으로 설계되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때 프러시아와의 승리의 기념으로 글로리테와 넵튠분수가 만들어 진것으로 일종의 미완의 궁전인 셈이다.

역사가 오래되서 인지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영광과 굴욕을 함께 한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화려한 개선문도 있었지만. 그전 한때는 터키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가 폰에흐라후와 니콜라우스 피카시에 의해 증축과 개축되었다. 이때 피카시에 의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전해 진다. 또 방방이 얽힌 사연도 많아 보였는데, 나폴레옹 점령시기에는 나폴레옹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방.... 나폴레옹과 황녀 마리아 루이즈 사이에 태어난 로마왕이 평생 유패되었던 방... 중국 도자기로 꾸며진 방(사실 이곳 도자기중 진품은 상들리에에 달린 3개 뿐이다).. 세계 각국과 연결되었던 문화적 위용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1918년 1차세계대전 패망과 더불어 당시 황제 Karl 1세가 패망을 선언하고 종전후 이 궁을 떠남으로 합스부르크가가 문을 닫게 되는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한가지 감명 깊었던것은 합스부르크가에 수 많은 황제들이 있었지만 이억만리 떨어진 곳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분은 마리아테레지아 여왕 이었다. 그정도로 이분이 한 일이 많다. 부역의 경감, 어린이의 노동 금지, 방학제도의 개선, 수도원 영지의 몰수, 복지의 개념 도입, 교육제도 개혁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신것으로 사실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기초을 이루었고 오스트리아의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분이다. 또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머니 이기도 하시다.

처음에 이분은 부왕이 사망하자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했음에도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 났다. 이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방을 할양했으나 영국과 손을 잡아 아헨조약에서 상속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 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사실 이분의 아버지인 카를6세는 일찌감치 이분의 능력을 간파 하시고 제왕의 교육을 시키고 합스부르크가를 계승 시킨것 이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미남인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을 시킨다. 하지만 부황이 돌아가시고 나서 오스트리아는 계승 할 수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상속 할 수 가 없었다. 그때만해도 황제자리는 추대에 의한것인데 그녀는  여자 이므로 주교와 제후들이 추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황제로 앉히고 실질적인 권한은 본인이 행사 하게 된다. 황제인 프란츠 1세는 정치에는 욕심이 없는듯한 인물로 보였다. 테레지아 여왕 또한 평생을 이 남자에게 반해서 산듯 남편이 죽은 뒤에는 추모의 방까지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금슬도 좋아 자그만치 16명의 자녀을 두었다고 한다.

쉔부른 궁전의 색깔도 노란색 바탕인데, 마리아 테레지아 이분께서 개축하실때 이 색깔로 사용하게 하셨단다. 백성들의 세금 경감을 위해서 였다고 하니 마음씀씀이를 아실만한 분이다. 그래서 색깔 이름도 '테레지아 엘로우'라고 한다.

아까끼코에서..

점심식사는 아까키고라는 일식당에서 했다. 꽤 큰 체인점이라 처음에는 이 식당이 일본인 소유인줄 알았는데, 현지인 소유이고 안주인이 우리 한국인이라고 한다. 연 순 이익만 200억을 남긴다는 가장큰 체인 식당이다. 그중 마침 우리가 식사한곳의 메니져는 한국인이고 아내가 일본인 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느낀건데 한글로 써져 있다고 해서 한국인이 운영하란 법은 없다는것이다. 대부분 중국인.. ㅋㅋㅋ 속지 마시라.

암튼 소시지에 찌들려 있다가 간만에 쌀밥이 들어가니 살것 같다. 10유로에 된장국 약간과 스시 4쪽.... 좀 비싼편이다.

벨베테레 궁전

유진 장군.... 이분이 오스트리아에서는 꽤나 유명한 분이다. 터키군을 쳐 부수고 스페인까지 쳐들어가서 스페인을 독립 시켰다나.... 키는 굉장히 작은 분 인데.. 암튼 이분의 여름 별장이라고 한다. 벨베테레라는 말이 '아름다운 경치'를 의미 하며 건축학적으로는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높은곳에 건축된 건축물을 의미 한다고 한다. 바로크풍의 정원이 참 아름다운곳이었다. 멀리 슈테판 성당과 비엔나 시내의 풍경도 보이고... 벌판 같은 느낌이 시원스레 좋다.

시민 공원

한인 가계에서 프뤠빌레 목걸이와, 쌍둥이 칼, 실리트 도마를 샀다. 나름 선물할때가 좀 있어서.... ㅎㅎ  쇼핑을 마치고 근처 요한 시트라우스의 동상이 있는 시민공원에서 사진을 몇장 찍었다. 당대의 요한 시트라우스는 왈츠 작곡가로 유명한데... 요즘으로 말하면 오빠부대가 항상 따라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분위기는 기막히게 잘 띄우지만 정작 비엔나 시민중 유일하게 본인은 왈츠를 못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위기를 띄운 다음에는 슬쩍 빠지는.... ^^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상 주위를 도는데 공원에 사람들이 참 많고 무엇보다 관광객이 많은것 같다. 무엇보다 눈에 번쩍띄는 미인을 발견했는데,  프랑스 여자 였는데 정말 영화배우처럼 생겼다..  나중에 체코에서 다시 만나게 될줄 그때는 몰랐지만....ㅋㅋ

타펠 슈피츠

오스트리아 음식의 대부분은 소금에 절인 소시지 돼지고기 정도로만 알았는데 저녁식사 메뉴로 먹은 타펠 슈피츠는 제법 먹을만했다. 황제가 먹던 음식이 이것이고 서민들은 돈까스와 비슷한 슈니츨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타펠 슈피츠는 일종의 소고기 수육같은것인데, 전식으로 나오는 야채 스프도 먹을만 했고, 매생이 맛이 나는 시금치 소스도 좋았다. 처음에는 정말 해조 스프인줄 알고 자신있게 "해조 같은데요!" 했는데 시금치 란다.. 수육고기에는 후추를 시금치 소스에는 소금을 첨가해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먹는것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일은 슈니츠를 먹는다고 하는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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