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게 역사란 관점이다. 분명 사람들은 이유 있는 행동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츨라프 4세가 네포묵 신부를 그런 이유로 죽였다는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적어도 왕인데 그런 이유로 드러내 놓고 신부를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을것 같다. 아마 틀림없이 권력관계적인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져 봤다. 여행 덕분에 유럽의 역사가 쉽게 이해가 되어서 기분이 유쾌하다. 역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체코의 전성기를 이끌던 성군 카를 4세가 1378년 사망하자 아들 벤첼이 바츨라프4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하게 됩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합스부르크는 제후들의 추대)이전에는 형식상이나마 교황이 지명하게 되어 있었는데, 바츨라프 4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바츨라프 4세는 로마 교황에게 반기를 드는 얀 후스(종교 개혁가)를 선호하게 되었고 교황과는 담을 쌓고 지내게 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정적이자 동생 지그스문트 제위 시절 후스전쟁이 발발하여 체코의 민족운동화 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앞전에 성 네포묵 신부에 관한 야사를 이야기 한적이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정사는 위의 사실을 배경으로 엮어 집니다. 프라하에 새 주교로 체코에 온 옌슈테인의 얀과 바츨라프는 끊임없이 충돌 하게 되는데 화가 난 바츨라프 4세는 대주교인 옌슈테인의 얀과 대리신부인 얀 네포묵을 잡아드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대주교는 도망을 가게 되고 네포묵 만 잡혀와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의 시체 또한 카를교에서 볼타바 강으로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게된 카톨릭 교회는 희생양이 된 네포묵 신부를 성자로 추대하게 됩니다. 얀 후스파의 영향력아래 신교로 방향을 잡고 있었던 체코를 다시 카톨릭화 하기 위한 방법 이었지요. 그만큼 네포묵의 순교 이야기는 카돌릭에게 이용가치가 높았던 것 입니다. 바츨라프 4세는 나중에 폐위되어 정신분열증과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다가 사냥중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지그스문트 시절 후스를 처형하고  콘스탄츠 공의회를 제창하여 교회 분열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이는 후스 종교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지그스문트의 사후 왕가와 제위는 단절되고 왕가의 영지는 사위인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 2세가 소유하게 됩니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30년 전쟁(이 전쟁은 전쟁의 주재국을 기초로 4기로 나눠 구분한다. 즉 제 1기는 보헤미아-팔츠시대, 제 2기는 덴마크시대, 제 3기는 스웨덴시대, 제 4기는 프랑스-스웨덴시대였다.)을 합스부르크가의 유럽 제패 야욕으로 이용하면서 이때 철처하게 패 했던 체코의 후스 세력들은 모두 화형 당하거나 추방 되면서 체코의 귀족과 전 지배층이 몰락하게 되면서 체코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합스 부르크가는 체코를 카돌릭화 하기 위해 바로크 양식을 들여와 성당과 건축물에 이용하게 됩니다. 후스주의가 추구했던 엄격한 절제, 검소함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은 이런 목적하에 체코에서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라하의 바로크'라는 용어까지 생겨나게 되었는데 때문인지 체코의 지식인들은 이 카를 다리위를 지나 가는것을 몹시 싫어 했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에 의해 세워진 석상들이 체코의 정기를 억누른다고 생각했을것 같다는 생각 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체코 지식인들이 그렇게 싫어 했던 카를교와 바로크 건물들이 작금의 체코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이또한 재미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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