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게 역사란 관점이다. 분명 사람들은 이유 있는 행동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츨라프 4세가 네포묵 신부를 그런 이유로 죽였다는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적어도 왕인데 그런 이유로 드러내 놓고 신부를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을것 같다. 아마 틀림없이 권력관계적인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져 봤다. 여행 덕분에 유럽의 역사가 쉽게 이해가 되어서 기분이 유쾌하다. 역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체코의 전성기를 이끌던 성군 카를 4세가 1378년 사망하자 아들 벤첼이 바츨라프4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하게 됩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합스부르크는 제후들의 추대)이전에는 형식상이나마 교황이 지명하게 되어 있었는데, 바츨라프 4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바츨라프 4세는 로마 교황에게 반기를 드는 얀 후스(종교 개혁가)를 선호하게 되었고 교황과는 담을 쌓고 지내게 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정적이자 동생 지그스문트 제위 시절 후스전쟁이 발발하여 체코의 민족운동화 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앞전에 성 네포묵 신부에 관한 야사를 이야기 한적이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정사는 위의 사실을 배경으로 엮어 집니다. 프라하에 새 주교로 체코에 온 옌슈테인의 얀과 바츨라프는 끊임없이 충돌 하게 되는데 화가 난 바츨라프 4세는 대주교인 옌슈테인의 얀과 대리신부인 얀 네포묵을 잡아드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대주교는 도망을 가게 되고 네포묵 만 잡혀와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의 시체 또한 카를교에서 볼타바 강으로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게된 카톨릭 교회는 희생양이 된 네포묵 신부를 성자로 추대하게 됩니다. 얀 후스파의 영향력아래 신교로 방향을 잡고 있었던 체코를 다시 카톨릭화 하기 위한 방법 이었지요. 그만큼 네포묵의 순교 이야기는 카돌릭에게 이용가치가 높았던 것 입니다. 바츨라프 4세는 나중에 폐위되어 정신분열증과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다가 사냥중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지그스문트 시절 후스를 처형하고 콘스탄츠 공의회를 제창하여 교회 분열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이는 후스 종교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지그스문트의 사후 왕가와 제위는 단절되고 왕가의 영지는 사위인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 2세가 소유하게 됩니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30년 전쟁(이 전쟁은 전쟁의 주재국을 기초로 4기로 나눠 구분한다. 즉 제 1기는 보헤미아-팔츠시대, 제 2기는 덴마크시대, 제 3기는 스웨덴시대, 제 4기는 프랑스-스웨덴시대였다.)을 합스부르크가의 유럽 제패 야욕으로 이용하면서 이때 철처하게 패 했던 체코의 후스 세력들은 모두 화형 당하거나 추방 되면서 체코의 귀족과 전 지배층이 몰락하게 되면서 체코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합스 부르크가는 체코를 카돌릭화 하기 위해 바로크 양식을 들여와 성당과 건축물에 이용하게 됩니다. 후스주의가 추구했던 엄격한 절제, 검소함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은 이런 목적하에 체코에서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라하의 바로크'라는 용어까지 생겨나게 되었는데 때문인지 체코의 지식인들은 이 카를 다리위를 지나 가는것을 몹시 싫어 했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에 의해 세워진 석상들이 체코의 정기를 억누른다고 생각했을것 같다는 생각 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체코 지식인들이 그렇게 싫어 했던 카를교와 바로크 건물들이 작금의 체코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이또한 재미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목록 - 출처 : 위키 백과]
다음은 샤를마뉴이후의 선출황제를 포함하는 모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명단이다. 황제의 순서매김은 독일의 군주를 따랐으므로 게산상의 공백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새사냥꾼 하인리히는 독일의 왕이었지만 황제는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2세는 그의 후계로 “하인리히 2세”로 번호를 매긴다.
카롤링거 왕조
카롤루스 대제 (카를 1세), (800년-814년)
루트비히 1세 경건왕, (814년-840년)
로타르 1세, (843년-855년)
루트비히 2세, (855-875)
카를 또는 샤를 2세 대머리, (875년-877년)
카를 3세 뚱보왕, (881년-887년)
귀도 왕조
스폴레토의 비도, 891-894
스폴레토의 람베르트, 894-898
카롤링거 왕조
아르눌프, 896-899
루트비히 3세 맹인왕 , 901-905
프리울리의 베렝가르, 915-924
오토 (작센) 왕조
오토 1세, 962-973
오토 2세, 973-983
오토 3세, 996-1002
하인리히 2세, 1014-1024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재위: 919-936)에 이어 "하인리히 2세" 계승)
잘리어 왕조
콘라트 2세, 1027-1039 (독일의 왕 콘라트 1세(재위: 911-918)에 이어 "콘라트 2세" 계승)
하인리히 3세, 1046-1056
하인리히 4세, 1084-1105
하인리히 5세, 1111-1125
슈플린부르크 왕조
로타르 3세, 1133-1137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제위: 855- 869)에 이어 "3세"로 칭함)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1155-1190 (그의 치세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칭이 생기다)
하인리히 6세, 1191-1197
벨프 왕가
오토 4세, 1209-1215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 1220-1250 (“세계의 경이”로 알려짐)
룩셈부르크 왕가
하인리히 7세, 1312-1313
비텔스바흐 왕가
루트비히 4세, 1328-1347
룩셈부르크 왕가
카를 4세, 1355-1378
지기스문트, 1410-1437
합스부르크 왕가
프리드리히 3세, 1452-1493
막시밀리안 1세, 1508-1519 (선출 황제)
카를 5세, 1530-1556 (1558년까지 공식 사임하지 않음, 1519-1530 에는 선출 황제였음)
페르디난트 1세, 1556-1564 (선출 황제, 단 1558년까지는 공식적으로 선출황제가 아니었음)
막시밀리안 2세, 1564-1576 (선출 황제)
루돌프 2세, 1576-1612 (선출 황제; 독일의 왕 루돌프 1세(재위: 1273-1291)에 이어 "루돌프 2세" 계승))
마티아스, 1612-1619 (선출 황제)
페르디난트 2세, 1619-1637 (선출 황제)
페르디난트 3세, 1637-1657 (선출 황제)
레오폴트 1세, 1658-1705 (선출 황제)
요제프 1세, 1705-1711 (선출 황제)
카를 6세, 1711-1740 (선출 황제)
비텔스바흐 왕가
카를 7세 알베르트, 1742-1745 (선출 황제)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1세, 1745-1765 (선출 황제)
요제프 2세, 1765-1790 (선출 황제)
레오폴트 2세, 1790-1792 (선출 황제)
프란츠 2세, 1792-1806 (선출 황제)
[30년 전쟁 - 출처:위키백과]
보헤미아-팔츠시대(1618년 ~ 1624년)
당시 보헤미아는 가톨릭 국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신구 양쪽교도들 사이에 여러차례 불협화음이 일어났으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개신교도의 세력이 크다는것을 인식하고 신앙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 황제겸 보헤미아의 왕 마티아스(합스부르크)도 양쪽진영에 대한 융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617년 열렬한 가톨릭 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왕에 선출되는 동시에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실시했다. 다음해 1618년 탄압에 반발한 개신교 시민들이 프라하의 왕궁을 습격해 국왕 고문관 3명을 왕궁의 창문에서 던져버리는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란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개신교인 보헤미아 제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반란군 제후들은 다른 개신교 제후에게 협력을 호소하였고, 개신교 제후연합의 찬성을 얻어냈다. 다음해 1619년 황제 마티아스가 사망하고, 보헤미아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임하게 되자, 보헤미아의 제후는 의회에서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 제후연합의 중심적 존재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하고 황제에게 대항하였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개신교도 동맹측이 개혁교회(칼뱅주의 교회)와 루터교의 대립으로 발이 묶여있는 사이 로마 가톨릭 세력의 연대를 강화해 교황의 원조금과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군 및 바이에른 대공 막시밀리안 1세등의 가톨릭 제후의 원조를 받아 틸리 백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사실상 가톨릭 동맹세력이 우위을 차지함으로써 이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 1620년 11월 8일 개신교를 믿는 보헤미아군은 바이센베르크 전투(흰산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에게 괴멸적인 대패을 당했고,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크(프라하)는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겨우 1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어 겨울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가톨릭 동맹군이 팔츠에 침공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5세는 1622년 네델란드로 도망쳤다. 그는 복위를 노렸으나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선복귀요청을 거절하여 1632년 객사했다. 1623년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팔츠을 하사하고, 선제후의 지위을 주었다. 이것은 금인칙서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제후의 분노를 사게 되어 30년 전쟁이 장기화하게 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지배는 강화되었다. 곧이어 1627년 신(新)영지조례법에 의해 의회는 권력을 모두 빼앗기게되어 사실상 속령이 되었다. 이로인해 다수의 보헤미아 귀족 및 개신교도가 망명하여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재산몰수 및 국외추방 이라는 가혹한 전후처리는 다른 개신교 제후의 이탈을 초래하게 되었고, 전쟁이 장기화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덴마크시대(1625년 ~ 1629년)
황제는 프리드리히에 대한 처벌로 영방의 라인팔츠와 오버팔츠에 있던 선제후위을 빼앗고, 새로이 전공을 세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황제권력 앞에 정세는 긴박하게 움직여 황제 대 선제후라는 정치적 대립관계가 종교상의 대립과 미묘하게 교체하게 되었다.
또한 이 라인팔츠의 영유를 둘러싼 문제는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얽히게 되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는 이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선대 황제 마티아스로부터 알자스 지방의 영토을 할양받는다는 밀약을 얻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 이탈리아에서 프랑슈, 코덴을 거쳐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로 군을 보낼 시기에 중요한 전략적 루트였다.
그래서 이 지역 문제는 그대로 프랑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다. 이 당시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1624년 합스부크르 왕가의 세력강화를 두려워한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및 네델란드, 영국, 스웨덴, 덴마크을 포함한 [대(對) 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가톨릭 동맹을 견제했다. 또한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부터의 지원루트을 막았다.
1625년 5월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측에 참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개신교도였고, 바이센베르 전투(흰산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진 가톨릭 진영에 대항하기 위한것이 표면상의 참전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성로마제국의 니더 작센의 구역장으로써 오랫동안 빈자리로 남아있는 2개의 제국내 사교직(司教職)에 자신의 아들을 취임시킬것을 요청하였으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거절하고 틸리 백작의 군대을 니더 작센에 진군시켜 머무르게 한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이렇게 되자, 북 독일에서 세력확대와 함께 발트해, 북해에 대한 패권확립을 노리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아들의 사교직 취임문제에 대해 페르디난트 2세의 노골적인 반대을 받고, 프랑스, 영국, 스웨덴의 동맹국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1625년 5월에 전쟁에 참전했다. 처음엔 스웨덴과 함께 개입하려 했으나, 양쪽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결과적으로 스웨덴은 폴란드문제에 주력하고 덴마크가 단독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영국은 군사비를 제공하고, 만스펠드, 브라운슈바이크란 2명의 용병대장의 군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덴마크의 참전으로 인해 페르디난트 2세는 군사비 부족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상비군으로 응전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보헤미아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등용하고 그의 군대에게 개신교군과 싸울것을 의뢰했다. 한편 덴마크군과 용병부대 사이에서 전략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결국 3사람 모두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발렌슈타인의 각개격파 전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려 만스펠드는 데사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브라운슈바이크도 1626년 1월 13일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1626년 8월 크리스티안 4세는 믿고 있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해 루터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 틸리 백작에게 완패 당하고 말았다.
크리스티안 4세가 전력을 잃어버리자,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군대는 덴마크에 침입해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령에 있던 포메른, 메크렌부르크 공작령뿐만 아니라 유틀란드 반도도 유린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에게 지원을 요구했고 곧 동맹이 성립되었다. 얼마안가 발렌슈타인을 덴마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결국 1629년 뤼베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는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또한 같은해 황제가 발령한 회복칙령은 광대한 사교령과 수도원령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을 성사시켰다.
스웨덴시대(1630년 ~ 1635년)
1630년 7월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발트해 진출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한편 대륙진출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개신교 옹호을 표방하고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의 군사비 원조을 얻어 28척의 전함과 수송선에 기병 16개 부대, 강력한 포병이 배속된 보병 92개 중대, 합계 13,000명의 대군을 승선시키고 북부 독일의 우제돔에 상륙했다.
한편 그해 8월 24일 레겐스부르크의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는 가톨릭 제후의 지원을 얻지못해, 발렌슈타인과 그의 용병부대을 대량으로 해고하고 틸리 백작의 가톨릭 동맹군으로의 편입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곧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써 포메른 지역의 요새화을 꾀하고, 보급병참기지을 설정하려 했으나, 브라덴부르크 선제후 및 개신교 제후들은 협력을 거부하여 그의 전략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마그데부르크 시(市)가 황제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틸리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 마그데부르크 시 구원을 위해 구스타프는 프랑크부르트 공격을 미끼로 양동작전등을 구사해 틸리군을 유인해 내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틸리도 노련한 수완을 보여줘, 일진일퇴의 기동(起動)을 되풀이 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랑크부르트와 마그데부르크 양측 도시가 각자의 군대에게 약탈을 당하는 결과를 빚게되어, 구스타프의 마그데부르크 구원작전은 실패했다.
스웨덴군은 그후 곧바로 방어자세로 일관했다. 1631년 7월~8월에 걸쳐 보급의 차질로 인해 위험한 상태에 빠지자 베를린에서 수비에 들어갔다. 틸리는 이곳을 2번에 걸쳐 공격했으나,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것을 보고, 관망하던 북부 독일의 2대 개신교파 브란텐부르크와 작센의 양 선제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9월 11일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는 자신의 군대을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지휘하에 두었다. 한편 틸리군은 9월 15일 라이프치히시에 입성했다. 군대는 약 36,000명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스웨덴군 26,000명과 작센군 16,000명의 각군은 북쪽 약 25마일(약40km)의 뒤펜에서 합류했다.
1631년 9월 17일 황제군의 명장 하인리히 파펜하임 기병장군(1594~1632)는 교묘한 기동으로 스웨덴군을 유인하여 라이프치히 북쪽 약 4마일(약6.4km)의 브라이텐펠트 평원에 포진한 틸리군과의 결전으로 구스타프왕을 끌어들였다. 허나 구스타프는 자신의 군을 새로운 군제(軍制), 장비, 전술로 탈바꿈시키고, 신 전술의 전투대형으로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신전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구체제의 테르시오로 조직된 틸리군에게 결정적 패배을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인해 세력관계는 단숨에 역전되어, 황제측은 수세로 몰리게 된것과 더불어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구스타프는 네델란드의 마우리츠 모델의 전술을 계승발전시켜 횡대, 기병, 포병의 3병전술의 우수성을 실증하여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승리 후 구스타프왕은 거의 저항을 받지않고 마인강을 건너 라인란드와 제국 여러도시을 제압해 12월 22일 마인츠을 점령하고 남은 동절기을 이곳에서 보내었다. 다음해 봄 남부 독일을 침공한 구스타프는 자신이 구상하는 스웨덴 주도의 독일 개신교도 제후의 대동맹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뭔헨으로 남하했다. 그래서 1632년 4월 15~16일에 걸쳐 레히강 전투에서 틸리의 야영진지을 기습해 틸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남부 독일을 점령했다. 틸리는 이때 받은 부상으로 인해 얼마안가 죽고 말았다.
이 시기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크게 당황하였다. 틸리의 전사로 인해 그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가오는 스웨덴군의 위협에 대항해 황제는 당시 보헤미아의 영지에서 재기을 노리던 발렌슈타인을 재기용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1630년 8월 [전횡이 극에 달했다]라고 하여 면책한 발렌슈타인에게서 [군대의 전권, 화평교섭권, 조약체결권의 전면위임과 합스부르크 제국령과 선제후령의 할양]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군의 지휘관으로 재소환하였다.
발렌슈타인은 빠른시간에 새로운 군을 조직하여 1632년 7월 11일 발렌슈타인군은 스히바츠에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는 구스타프는 2만 병력에 2배이상되는 45,000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테 페스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한편 구스타프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에 걸쳐 야영중인 발렌슈타인군에 대한 기습에 나섰으나, 이것은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발렌슈타인는 보헤미아로 구스타프는 북서쪽으로 각자 후퇴했다.
그후 9월부터 10월에 걸쳐 발렌슈타인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에 침공했다. 후방연락선을 차단되는 위협을 느낀 구스타프는 곧바로 북상을 개시했다. 그리고 나움부르크에서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야영을 보냈으나, 발렌슈타인이 파펜하임과 대증원부대을 요청하였다는 정보을 얻은 구스타프는 급히 공격을 위해 출격했다.
그래서 11월 16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기어코 결전의 서막이 열렸다. 격렬한 전투끝에 가까스로 스웨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구스타프 자신은 흉탄에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다(뤼첸 전투). 전투 후 국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재상 옥슨쉐르나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 하이르브론 동맹을 체결하고 [방어전쟁]이란 형식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이 소식을 알게된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개신교 제후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손잡고,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스타프의 죽음은 개신교 제후들을 동요시켰다. 거기에 스웨덴군과 개신교 제후들간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군의 사기를 높여주게 되었고,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황제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발렌슈타인을 1634년 1월 24일에 암살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 제거는 군사적으로는 마이너스였고, 아직도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제국의 제후들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의 세습을 위해 제후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개신교측은 구스타프가 죽은후 작센-바이마르 후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프 호른이 지휘을 물려받았다. 1634년 9월 6일 스웨덴-개신교 제후군(하이르브론 동맹)은 보병 16,000명, 기병 9,000명을 이끌고 뇌르트링겐 전투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 추기경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군대 35,000명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의 약점이었던 일제사격 후 재장진의 빈 시간을 노려 돌격해 개신교군에게 전사자 17,000명, 부상자 4,000명이란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대승리을 얻게 되었다. 이 승리로 인해 주도권을 되찾은 황제는 아들 페르디난트을 로마 왕으로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후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과도 화해하고 스페인의 참전에 용기백배하여 여러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다음해 5월 30일 황제측의 유리한 상황하에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황제의 위광을 높여주었지만 결국 일시적인것에 불과했다. 스웨덴이 세력을 잃고, 하이르브론 동맹이 붕괴의 위기를 맞게되자 재상 옥슨쉐르나는 수완을 발휘해 흑막에 있던 프랑스을 직접 전쟁에 개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30년 전쟁은 제4기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스웨덴 시대(1635년 ~ 1648년)
스웨덴과 독일 개신교 제후의 든든한 방패였던 프랑스는 스웨덴의 구스타프왕이 전사한 후 재상 옥슨쉐르나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여, 서부,남부 독일 개신교 제후의 [하이브론 동맹]이 와해되면서 스웨덴이 고립되게되자, 기어코 전쟁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1635년 5월 21일 스페인에게 선전포고을 하고, 여기서 부르봉 왕가 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접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스웨덴의 재상 옥슨쉐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전략이 서로 맞붙었다. 프랑스군은 주로 스페인군과 스웨덴군은 황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황은 처음 수년간은 프랑스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프랑스는 훗날 명장이라 칭송받게 되는 최고의 장군인 튀렌(1611~75년)과 콩데공(公)(1621~86년)을 전쟁에 참가시키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조금씩 전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이때 공세에 나선 황제군이 비토스톡 전투 에서 스웨덴군에게 패배하게되고, 승리한 스웨덴군은 다시 독일에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 합스부르크 세력의 정세가 호전되었고, 1640년때부터는 합스부르크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네델란드에서는 네델란드 연방공화국이 스페인을 격파해 요충지 브레다요새을 함락했다. 이 승리는 네델란드의 독립을 확실시하게 만들었고, 거꾸로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졌다는것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세속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새로이 황제가 된 인물은 뇌르트링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아들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 3세로써 즉위했다.
프랑스군의 용병대장이 된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도 공세에 나서 1638년 라인팔츠, 브라이베르크, 브라이작흐을 함락시켰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프랑스와 마찰을 일으켜, 후에 작센군과 프랑스군은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해 스웨덴군은 하이드브론 동맹을 배반한 작센군을 겜니츠에서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침공했다. 이때 스웨덴군 베넬장군의 야심으로 인해 통솔이 어지렵혀져 격퇴되었다. 다음해 1639년에아푸르트에서 프랑스군, 스웨덴군, 프로이센군이 접촉하였다.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은 후에 대선제후로 불리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음해 1640년 프로이센공(公)이 되면서 방위전쟁에서 물러나 사실상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1640년경부터 황제는 화평을 향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그 고압적인 태도에 응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이 시기부터 프랑스, 네델란드 앞에서 패퇴를 거듭해 몰락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해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포루투갈 왕국이 독립하였다.
1642년 황제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다시 스웨덴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곳은 예전에 황제군과 스웨덴군이 맞붙었던 유명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황제는 이 패배에 굴복해 화평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제국 전체에서 전투를 기피하는 기분이 만연해 있었다. 1642년 후반쯤 라인강의 양쪽 강변에서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1644년이 되어서야 교섭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교섭에서 우위을 차지하기 위한것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가 뒤섞여지면서 매우 격렬해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법에 의해 국제회의는 설치되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은 스웨덴이 화평회의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1642년 재상 리슐리외, 1643년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차례로 죽고, 리슐리외의 정책은 새로운 재상이 된 마자랭이 물려받았으나, 새로이 국왕이 된 루이 14세는 아직 어렸기에 프랑스 국내는 불안정해졌다. 그 때문에 마자랭은 물려받은 정책중에 [국왕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어라]라는 야심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왕족 콩데공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워 여기서 스페인의 군사력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1644년 브라이부르크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의 중심이었던 바이에른군을 격파하면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승리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편 스웨덴은 독일에서 전투를 벌이는 스웨덴군의 배후를 위협하던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토르스텐손 전쟁이라 불리었다. 스웨덴군은 네델란드 해군을 우방으로 만들어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30년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발트해의 패권을 기어코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구스타프 호른장군이 복귀하였다. 황제군은 덴마크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참패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보헤미아에 침공하였다. 1645년 프라하 근교의 얀카우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은 대패했고, 이때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빈으로 도망쳤으나, 이것은 예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보헤미아 왕)의 도망과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도망]이라고 조소받았다.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같은해 바이에른군도 스웨덴군에게 패배해 바이에른 공작은 프랑스와 화해를 맺고, 고립된 작센 공작도 스웨덴군과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화평회의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국제회의에서는 영국, 네델란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여러나라가 참가했다. 그러나 1646년 황제군이 얀카우 전투의 패전에서 경이적인 부활을 이루어냈다. 황제군이 바이에른과 다시 합류하는것을 두려워한 스웨덴은 바이에른에 다시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이것을 월권행위로 보고, 스웨덴의 견제을 위해 명장 튀렌을 파견하였다. 양군에게 포위된 바이에른은 굴복했으나, 이후 바이에른군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군에 합류했다.
1618년 보헤미아-팔츠 전쟁이 발발했던 그곳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1648년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은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세를 굳혔다. 스웨덴군은 프라하을 포위하고 이곳을 점령한 후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려는 태세을 준비했다. 황제는 기어코 10월 24일 화평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보헤미아의 정복과 개신교화을 위해 1648년 7월 26일 이후 프라하에서 전투를 계속되었다. 가톨릭 진영의 최후의 요새였던 프라하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결코 항복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스웨덴의 왕이 된 당시 스웨덴군 총사령관 카를 10세도 원군으로 달려와 포위전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11월 2일 프라하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소식이 전해지자 이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친정을 개시한 크리스티나 여왕의 정책으로 인해 화평교섭이 새로운 전개가 일어나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조직을 넘어서 전 유럽의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그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때까지 유럽의 국제정세을 규정하는 것이 되었다. 1648년 체결된 역사상 최초의 다국가간 조약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전쟁은 최종적으로 결판나지않아, 그 결과 거의 300개에 달하는 연방국가의 분립상태가 확정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에 의해 멸망할때까지 존속하게 되지만, 그것은 망령과도 같은 단순한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국가로써 남아 있게 된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왕이 아닌 오스트리아 대공,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로써 18세기, 19세기까지 살아 남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및 용병에 의한 약탈로 독일국토는 황폐해졌고,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흑사병)의 영향도 더해져 인구는 격감해 교전국간의 경제에도 엄청난 마이너스 효과을 주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투는 30년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겨우 종결되었다. 이 조약은 「루지용, 사르다냐, 아르투와 할양」,「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마리아 테레사는 50만 에스쿠드을 지참금으로 갖고오는 대신 그 댓가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은 포기]라는 조건이 들어 있었다. 이 전쟁을 거치며 스페인의 패권은 상실되고, 프랑스의 패권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30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속국 트란실베니아후(侯)의 개입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30년 전쟁에 관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압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