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EXPERIENCE/Traver 2013. 4. 26. 11:56

영화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크메르루즈의 만행은 참으로 끔찍하다. 전 국민의 1/3인 250만명이 학살 당한 일은 인류사에 없을 것 이다. 하지만 이 이면을 들여다 보면 미국과 시아누크 역시 책임을 회피하지  못 할 것이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의 허수아비 국왕이었던 할아버지가 죽자 프랑스로 부터 간택을 받은 왕 이었다. 놀기 좋아 하고 여자 좋아 하는지라 정치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았던 시아누크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감추고 있었다. 일본의 도움으로 잠시 독립하였던 캄보디아는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시아누크는 50년대 초반 프랑스에게 독립을 요구 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을 설득 하려 한다. 하지만 미국 역시 꿈쩍 않자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무장 독립운동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표를 하게 된다. 시대적 분위기에 프랑스는 독립을 허용하게 되고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가가 된다.

 

이 야심찬 시아누크는 허수아비 국왕으로서 만족 할 수는 없었는지 왕위를 아버지에게 양위하고 제 1당의 총재로 취임하여서 캄보디아의 정국을 쥐게 된다.하지만 이 시기 시아누크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게 되고 3세계 비동맹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에 시아누크가 중국과 소련등의 순방길에 오르자 친미적인 론놀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축출하게 된다.

 

하지만 론놀은 너무 부폐했다. 민심이 이반되어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 하게 된다. 사실 킬링필드의 주범 크메르루즈는 시아누크와 미국이 키운것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아누크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크메르루즈 지지 연설을 한 바도 있었으며, 미국은 베트남전 당시 호치민 루트(라오스에서 캄보디아로 연결되는 베트공 보급로)를 폭격하여 수많은 캄보디아 인민을 살상 했다고 한다.(당시 캄보디아는 명목상 중립국 이었지만 시아누크와 호치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폭격을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킬링필드 250만의 학살은 실질적으로 크메르루즈에 의한 학살과 미군의 폭격에 의한 사망 기타 내전으로 사망한 사람을 모두 취합한 숫자라고 한다. 암튼 비극적인 역사이고 크메르루즈 시아누크 미국 모두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 한것은 시아누크 사망때 캄보디아의 모든 백성이 비탄에 빠졌다는 사실 이다. 킬링필드 전범의 주역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의 집행은 미루어지고 있는 형국 이고... 근 현대사에서 우리역사와 캄보디아의 역사는 많이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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